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번의 난 (문단 편집) === 후반기(1676년 ~ 1681년) === || [[파일:external/stssyxx.stedu.net/2pdsf.jpg|width=100%]] || || 삼번의 난 후반기 형세도 || 강희제는 오삼계군의 중원 진출을 막기 위해 서북 전역을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무위 대장군 도해(圖海)를 임명했다. 도해는 한중을 넘어 진격해온 오삼계군을 격퇴하는 것과 동시에 [[감숙성]]의 반란군 거점 평량을 함락했다. 또한 반란에 가담한 섬서 총독 왕보신을 온갖 지극정성으로 회유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상황을 참작한다며 설득한 끝에 왕보신의 항복을 받아내고 반란이 화북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며 중원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복건의 경정충을 이탈시키기 위해 1676년에 절강성을 향한 집중 공세를 개시하며 항복을 제안했다. 이때 경정충은 같은편인 대만 동녕 왕국을 공격했다가 역으로 당해 영토 일부를 뺏기기도 하는 등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청의 집중타를 맞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강희제는 이 날을 위해 오삼계의 아들은 처형시켰음에도 경정충의 아들들은 나중에 죽일 생각으로 억류만 하고 있었고, 이에 한치 앞을 못 보던 경정충이 항복을 택했다. 뒤이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광주의 상지신도 1677년 5월에 항복했다. 애초에 상지신은 양쪽 사이에서 간을 보는 처지였기에 오삼계군의 광동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오삼계의 병력 지원 요청을 무시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경정충이 항복하자 즉시 오삼계 편에서 이탈하며 자신의 왕위와 번의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을 한 것이다. 그래도 상지신은 이 덕택에 일족을 보전할 수 있었고 본인도 곱게 죽긴 했다. 상지신은 반란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지위 보전이 목적이었기에 강희제는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었고, 연좌도 하지 않았다. 결국 반란은 다시 삼번의 난에서 오삼계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삼번 가운데 2개 번을 이탈시킨 청조는 중원 - 한중 - 사천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산악 험로를 포기하고, 대신 오삼계가 점령하고 있던 호남과 호북으로 공세를 집중했으나 [[둥팅호|동정호]] 전투와 창사 전투 등에서 크게 패하여 막히고 있었다. 그러나 오삼계군의 초반 기세가 사라진 것은 명백했고, 이제 주도권은 청이 쥐고 있었다.[* 오랜기간 동안에 연결된 루트에서 오삼계의 기반이 되는 운남에 중심지역을 타격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산악 험로이기는 하지만 한중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이였다. 이 길은 전국시기 秦이 연결한 길로 이 길을 통하여서 사천분지를 점령하였고, 운남지역까지 내려갔다. 그에 비하여 호북에서 호남을 거쳐서 가는 길은 처음에는 평지이지만, 호남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큰 길이 없는 밀림지역이였고, 중간 점령지인 귀주는 가난하기로 지금도 몇 손가락 안에 뽑히는 곳이었다. 우회해서 광서까지 간다고 하여도 광서도 귀주와 마찬가지로 빈약한 지역이고, 도로도 없으며,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다만 호남까지 진출한 오삼계군을 격퇴하여 적의 경제적인 이익을 제거하는 단기적인 전투목적으로 보여진다. 또한 청이 패하기는 하였지만, 동정호나 창사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호북일대가 청의 완벽한 관할로 돌아 섰음을 보여준다.] 오삼계는 이러한 상황을 정치적으로 뒤집기 위해 호북성 형주를 창천부라 개칭하고 도읍으로 삼아 국호를 [[주나라(동음이의어)#s-1.7|주(周, 오주)]], 연호를 소무(昭武)로 하고 1678년 3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8월, 달랑 5개월동안 제위에 있다가 [[노환]]으로 죽었다. 손자 [[오세번]](吳世藩)이 오삼계를 이어 주의 2번째 황제에 올랐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오삼계가 죽으면서 막강한 오삼계군의 유대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각지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다시 청조에 투항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세번은 불리함을 깨닫고 본거지인 곤명으로 후퇴하며 방어전으로 전환했고, 1678년 말엽이면 청조는 마침내 호남, 호북성을 완전히 탈환하기에 이른다. 결국 1681년 마지막 총 공세가 펼쳐지면서 사천 지방이 청조에게 넘어가고, 근거지 곤명까지 청군이 밀려오자 오세번은 자살했다. 곤명이 청군에게 함락되고 오삼계 일족이 멸족되면서[* 다만 오삼계의 다른 아들 하나가 도망치는데 성공해 후손을 남기긴 했다.] 삼번의 난은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